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레오파트라 7세 (문단 편집) === 안토니우스와의 관계 === 기원전 41년에는 킬리키아의 타르소스에서 제2차 삼두정의 선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으며, 그 역시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에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쓰일 자금을 얻기 위해 만남을 요청했으나, 곧바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다. 이후, 둘 사이에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가 태어났다. 옥타비아누스와 관계가 틀어진[* 다만 파르티아 원정까지 둘의 관계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파탄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소 옥타비아의 간곡한 청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소 옥타비아는 남동생과 남편이 결별하는 것과 전쟁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아서(소 옥타비아는 이미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두 아이가 있었고 안토니우스의 전처 풀비아의 아이들까지 맡아서 키우고 있었다.) 남동생을 설득했고 결국 누이를 무척 아끼던 남동생은 이 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국 안토니우스가 저지른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고 로마에서 안토니우스의 명성도 바닥까지 추락해 버렸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동방을 다시 방문했고, 아예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여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낳았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동방 원정을 지원한 공으로 "알렉산드리아의 기증"을 통해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 자녀들에게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전부 나눠주었는데,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으로 선언하고 카이사리온과 함께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도록 했으며, [[쌍둥이]] 중 남자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를 주었고 쌍둥이 중 여자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에게 크레타와 키레나이카, 막내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에게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주었다.([[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클레오파트라가 한 세기의 연애에 대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연애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일절 인정하지 않았고, 유언장에서도 클레오파트라나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카이사리온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로마에서 단지 구설수에 오르는 정도 이상의 문제는 겪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로마에서의 카이사르와는 달라서[* 이 당시 카이사르는 원로원파를 싹쓸이하고 로마 정계의 정점에 올랐다.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여전히 정적들에 비해 약세였고.] 아들 이름을 대놓고 [[카이사리온|작은 카이사르]]라고 짓고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열심히 이용했지만, 카이사르 입장에서도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에서의 지위를 안정시키는 것이 유리했으므로[* 로마가 소비하는 밀의 대부분이 이집트에서 생산되었으므로 당연히 친로마파인 클레오파트라가 정권을 잡는 것이 유리했다.] 이 관계는 양쪽 모두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었으며, 카이사르는 언제나 그랬듯이 바람둥이 노릇과 정치가로서의 입장을 잘 조화시켰다. >그녀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꽃을 피우고 지성이 힘을 발휘하는 나이에 안토니우스를 향해 갔다.[* 당시 클레오파트라의 나이는 28세였다.] >----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그녀는 언제나 관능적인 쾌락을 새롭게 찾아냈고, 그것으로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으며 잠시도 그가 한눈을 팔지 못하게 했다. 함께 주사위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냥을 했다. 안토니우스가 훈련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늘 함께했다. >----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반면 [[안토니우스]]는 정말로 홀렸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안토니우스도 여색에 빠져 모든 것을 맡기는 한량은 아니었다. 안토니우스가 추진했던 파르티아 정벌을 위해 군자금이 필요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풍부한 경제력을 지원하는 대신 안토니우스의 군사력을 원했던 것이다. 서로 정치적인 계산 하에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런 정치적인 계산만으로 보기에는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에서 너무 많은 것을 퍼주었다. 로마에서만 하게 되어 있는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었고, 클레오파트라의 세 아들[* 1명은 카이사르의, 2명은 안토니우스의 아들이었다.]이 로마를 분할하여 공동 통치하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워서 로마에서 정치적으로 강한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였던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소 옥타비아]]와도 이혼했고, 유언장에서는 로마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개인적 인망 역시 크게 잃었다. 더구나 사실상의 마지막 전투가 된 [[악티움 해전]]에서의 전개를 보더라도 자신이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전쟁 지휘 경험이 없다시피 한 클레오파트라에게 끌려다녔다. 따라서 안토니우스가 처음에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접근했을지 몰라도 정말로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렸다고 할 만하다. 반론으로는 안토니우스가 정치적으로 너무 무능해서 단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카이사르 생전에 군사적으로만 훌륭했을 뿐 정치적인 면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았으므로 무리는 아니지만,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딱 빠지지 않고서야 그 정도로 무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애시당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사후 카이사르 파와 원로원 파를 조정해서 로마의 내전을 막는 등 정치가로서 나름 능력을 보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관 카이사르의 정적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투쟁에서는 상당히 무능한 모습을 보였던 건 사실이다. 상술한 대로 로마 내전을 막긴 했지만 키케로의 술책과 원로원파의 공작으로 인해 로마의 적으로 찍혔을 정도니 말이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적잘한 시기 원로원파를 배신하고 안토니우스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안토니우스는 로마와 전쟁을 벌였을 수도 있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인 카이사르가 삼두정치 당시 정치의 중심인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를 자신의 지배하에 둠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내전에서 승리한 것을 보고도 정치의 중심지 로마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부유한 동방에서 사치를 누리면서 정작 로마의 일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어떤 고생을 하든, 자기 마누라와 친동생이 뭘 하건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는 지중해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점령한 상태에다 풀비아가 안토니우스를 등에 업고 계속 정치적 공격을 계속하던 도중이라 안토니우스와는 정반대로 그의 일생 중 가장 위험한 순간 중 하나였다고 할 정도고 특히 폼페이우스는 시칠리아에 눌러 앉아 로마의 밀 수입을 방해했고 그로 인해 하마터면 로마인들이 들고 일어나 쫒겨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안토니우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옥타비아누스를 도와서 정치적 빚을 지우고 생색을 낸다거나 혹은 그를 공격해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고 때에 따라서는 숙청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이 황금 같은 기회를 그냥 넘겼을 뿐 아니라 2개 군단을 꽁으로 넘겨주기까지 하였다.][* 이외에도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정치공세에 밀려 로마에서 쫒겨나 위험한 상황에까지 몰렸던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해방자 내전에 승리하고 다시 로마 정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줬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바로 직전까지 싸우던 사이였음에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키케로를 팽한 뒤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레피두스까지 끌어들여 제2차 삼두정치 체제를 실현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